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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umis AI가 요약한 글
- 1990년대에는 한국 영화는 외면받았지만, 1997년 '쉬리'와 1998년 CGV 강변점 개관 이후 멀티플렉스 확산과 스크린쿼터제도 유지로 한국 영화는 급성장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 특히 스크린쿼터제도는 1998년 영화인들의 거리 행진으로 대중적 지지를 얻어 유지되었고, 이는 한국 영화 산업 발전의 핵심 요인이 되었다.
- 멀티플렉스 확산과 스크린쿼터 유지는 한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영화는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미디어환경의 변화는 K콘텐츠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 "어떤 영화보러갈까?"라고 하면 90% 이상이 헐리우드 영화를 선택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 한국영화를 보러가자고 하면 "누가 한국영화를 보냐?"라며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 영화는 1,000만명이 관람하는 영화가 수십편에 이르고,
전 세계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며 한국 영화 또한 세계화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 배경에는 크게 2가지 미디어환경이 작용하였다.
멀티플렉스와 스크린쿼터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영화는 1997년 개봉한 '쉬리' 영화 그리고 1998년 개관한 CGV강변의 개관 전후로 나뉜다.
쉬리의 경우, 당시로써는 매우 큰 돈인 32억원이 투자된 거의 한국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그 영화의 가능성이 보였던 것일까? 1998년 강변역 테크노마트에 CGV가 11개의 극장이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개관하게 된다.
뒤를 이어 2000년에는 코엑스에 16개관이 밀집된 메가박스가 개관한다.
이후 2001년 태극기휘날리며, 실미도와 같이 1,000만명 이상이 관람하는 바야흐로 1,000만 영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멀티플렉스라는 영화관은 개봉관이 많아지게 되는 요소이고, 많은 개봉관과 쾌적한 관람 환경은 많은 팬들이 영화관에 방문하게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관이 많아진다고 한국영화가 성장하였다고 단정하기 힘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크린쿼터' 제도이다.
미국은 한국과 무역교역을 하며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도의 폐지를 요구하였고, 당시 한국 정부는 이를 수용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1998년과 1999년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스크린쿼터 사수 궐기대회'이다.
영화배우, 영화감독, 스태프, 제작사, 심지어 영화전공의 대학생까지 거의 수천명에 달하는 영화인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삭발투혼까지 하며 거리행진을 하며 스크린쿼터를 온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진
특히 수백명의 탑스타들이 모두 모여 거리 행진을 하니 이는 온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스타들의 영향력 앞에 결국 정부는 스크린쿼터제도를 유지하는 결정을 하였고,
미국 역시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또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된 고 김대중대통령의 영화사랑 또한 크게 한몫 하였다.
스크린쿼터제도의 유지와 멀티플렉스 개관은 분명 오늘날 한국 영화가 산업으로 발전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가 한국영화가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